'라스 만차스 통신( ラス・マンチャス通信 )'이라는 소설을 그림 한 장으로 표현한다면... 소설의 표지이기도 한 위의 그림처럼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부조리, 환상, 소년의 성장기라는 설명들은 현대 소설에서는 흔하디 흔한 느낌이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소설이 바로 오늘 소개하는 라스 만차스 통신이라는 소설입니다.
부조리 소설
부조리..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카프카입니다. 카프카의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다고 해도, 이름만으로 머릿 속을 가득 채우는 이미지는 분명합니다. 부조리..라는 말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고 말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고,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독자는 그 말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있을 수 없는 것'을 어렵게 상상하며 참아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정형화된 논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순리를 거부하는 것, 반항이나 삐뚫어짐과는 또 다른 '합리와 이성'으로부터의 일탈은 은근히 맛있는 재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조리를 전면에 내새운 글은 보통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뭐, 냉정히 얘기해서 부조리 소설, 부조리 극... 솔직히 재미없습니다. 재료가 좋다고 요리가 반드시 맛있는 건 아니죠. 마치 '복'처럼... 잘 만들면 맛있는 요리지만, 잘못하면 치명적인 독이 되는 것이 '부조리'가 아닌가 합니다. 카프카의 부조리 역시 솔직하게 말하면 첫 느낌은 매우 암담합니다. 커피나 담배처럼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그 맛을 이해할 수가 없죠. ( 케로군이 이해력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지만... 말이죠 )
그런 의미에서 히라야마미즈호( 平山瑞穂 ) 라는 작가는 상당히 훌륭한 조리사인 것 같습니다. 요리 재료가 '부조리'라는 것을 깨닫고 본능적으로 회피 동작을 취하기도 전에 눈을 텍스트에서 뗄 수 없도록 붙잡아 둘 수 있는 능력이 보이니까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작가의 능력은 '복' 자체를 극히 잘 다루는 데 있다기보다는, 필요한 양념이나 다른 재료를 적당히 잘 버무릴 줄 안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케로군은 '부조리 소설'이 아닌 '환상 소설'의 재미에 빠졌는지도 모릅니다.
환상 소설
환상 소설은 판타지 소설입니다. 우리나라의 '전형적이고 고정 관념에 묶인' 판타지 소설에 대한 비판은 자주 입에 담는 안주거리지만, 그렇다고 해외라고 해서 정말정말정말 독특하고 신기한 환상 소설이 널리고 널리지는 않았습니다. 국내에 소개되는 해외 판타지 소설 중에도 분명 옥석을 가릴 필요는 있죠. 그런 의미에서 '라스 만차스 통신'의 발견은 귀중한 발견인 것 같습니다.
등장 인물의 정확한 캐릭터, 배경 지역 등의 정보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자세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독자에게 중요한 정보를 애써 숨긴다는 느낌은 아니지만, 어쨌든 정보 전달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분명히 정상적인 세계가 아니고, 분명히 무언가 있지만... 제공되는 정보는 꼭 필요한 것 뿐... 썰렁하거나 내러티브,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절제된 단어와 문장으로만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는 느낌? 이런 절제된 모습 덕분에 분명 '소설'인 '라스 만차스 통신'은 '시'적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만화와 같은 제한된 정보 제공, 설명의 단절 덕분에 라스 만차스의 환상은 상상력을 극도로 자극합니다. 그리고, 작가가 원래 의도한 것인지 내가 맘대로 상상한 것인지 답을 낼 수도 없도록, 끝까지 중요한 열쇠 몇 개에 대해서는 설명을 해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검도 기사도, 용도 마법도 등장하지 않는 이 소설이 진정한 '환상'을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아, 그래도 '설명이나 소문에서 언급되는' 외계인은 나오는군요... 음.음. 이쯤되면, 표지 그림의 저 이상한 '놈'에 대해서도 원래 함께 살던 가족처럼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여기까지 감정 이입이 가능한 걸 보면서도 이 소설이 판타지로서 훌륭하지 않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재밌는 소설
이래저래 복잡한 감상을 담았습니다만, 작가가 위에 나온 것 같은 '논리적인' 접근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물론 부조리의 가면을 쓰고 제멋대로인 척 하면서도 소설을 읽고 나면 엉망진창이란 느낌은 아닙니다. 결론은 '재미있다' 였습니다. 무엇이 재밌는지도 모를... 판타지 소설다운 좌충우돌과 부조리 소설다운 설명의 결여 속에서도, 어쨌든 재밌습니다.
어떻게 보면, 히라야마미즈호라는 작가는 부조리고 환상 문학이고, 그런 얘기에는 관심도 없을지 모릅니다. 재미에 대해서도, 매우 전형적인 유머와 이야기 구조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개인적일지도 모르고, 극히 우연에 의존하는 이야기를 단지 재밌다는 이유로 뻔뻔하게 원고로 만들어 버린 것이 이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네요. 재밌는 부조리 소설, 재밌는 환상 소설을 만나는 것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독특하다'는 느낌을 물씬 풍기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있는 작가가 반갑게 느껴집니다.
물론, 라스 만차스의 재미는 스즈미야하루히가 줄 수 있는 재미만큼 맵고 자극적이지 않습니다. 나스기노코의 유려한 문장이 주는 황홀감과 비교해서도 라스 만차스의 재미는 단순하기 그지없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이 소설이 '재미없다'라고 판단을 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만 ) 케로군이 무슨 대단한 미각을 가져서 라스 만차스의 맛을 찾아낸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이해력을 가져서 라스 만차스의 이야기가 재밌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몰모트처럼 여러 사람에게 이 책을 읽히고 어느 정도 재밌는지 실험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드는 건, 극중에서 '누나'를 서재에 두고 행복해하는 '누군가'에게 감정 이입이 되었기 때문일까요? 독자의 성향을 매우 심하게 탈 것 같은 이 소설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매우 궁금해집니다. '-'
이 소설은 독자의 성향을 많이 탄다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100점 만점을 줄만큼 완벽한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완벽함을 추구하는 소설들과는 어느 정도의 온도 차이가 느껴지죠. ( 노력하지 않고 쓴 글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로군이 받은 인상은 꽤 컸기 때문에 5점 만점의 별점이라면 4점을 주겠습니다. 자극적인 맛은 없더라도 한 번 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만하다...라는 느낌이랄까? 너무나 뻔한 글과 상상이 필요 없는 소설에 지치신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판타지 소설이나 부조리 소설의 매니아들도 한 번 쯤은 읽어보면 좋을 것 같네요. ...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약간의 혐오를 견디기 어렵거나 상상만 하려고 하면 머리가 깨지시는 분들에겐 비추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