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장르. 판타지를 표방하고 있지만,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걷습니다. 스릴러의 형식을 일부 빌려왔지만... 정통 스릴러는 분명 아니죠. 드라마...이기는 하지만... 드라마로 장르를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판타지이면서 주류를 벗어난 순간 이미 장르가 모호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형적인" 판타지를 연상시켰던 기존의 홍보는... 지난 번 구입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대박 실패한 홍보"가 될 수 밖에 없었죠.
그 다음 국적. 멕시코라고 적어 놓긴 했는데...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어느 나라 영화인가...를 자본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판의 미로"는 멕시코, 미국, 스페인 합작 영화가 되겠네요. 문화적 기반... 즉, 촬영지와 언어, 배경을 보았을 때 스페인 영화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또, 멕시코 영화이면서도 미국에서 가장 큰 수익을 거뒀고... 감독도 현재는 미국에서 활동 중이죠.
사실, 장르나 국적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상품의 탈 장르는 이제 새로운 얘기도 아니고, 자본의 국적이 사라졌듯이, 문화 상품의 국적도 애써 따지는 것도 왠지 시대 착오적으로 보입니다. 그렇더라도, 잠깐이나마 이런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엔터테인먼트 문화 상품에 대해 탈 장르, 탈 국가를 당연하게 이야기하면서도 실은 장르적 틀에 묶이고 문화적으로 편협한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 케로군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입니다. ) 그래서, '진정한' 탈 장르와 익숙하지 않은 문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 "판의 미로"를 경험한 것이 더욱 뜻깊은 일이 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 아래 글을 펼치시면 다수의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전쟁과 환상의 나선
먼저 "판의 미로"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판의 미로"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화의 서두에 소개되는 전설(?) 혹은 동화(?)의 지하 세계 이야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스페인 내전 직후의 혼란스런 현실 세계입니다. 두 가지의 배경은 서로 다른 이야기로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으면서 내러티브를 주도합니다.
처음 지하 세계 이야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약간의 상상력만 발휘한다면 '오필리아가 공주'라는 것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프랑코 군의 장교를 찾아가는 동안 잠깐 차에서 내려 요정을 만나고, 오필리아의 양아버지 뻘이 되는 프랑코 군의 비달 대위가 주둔한 곳 부근에 판의 미로가 있습니다. 비달 대위의 집사 메르세데스는 판의 미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심지어는 오필리아에게 '어머님이 판을 멀리하라고 했다'라고 얘기해 주기도 하죠... 여기까지만 보면 두 개의 나선은 금방 만나고 이어질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금방 이어질것만 같던 나선의 두 줄기는 끝까지 아슬아슬하게 만나지 않습니다. 환상 세계와의 연결 고리 오필리아는 누구에게도 환상 세계를 인정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오필리아의 주변 인물들은 환상의 세계를 알고 경험할 듯 하면서도, 결국 현실에 머물러 버립니다. 어쩌면 직접 현실 세계로 나와 문제를 해결해도 될 것 같은 판이라는 존재가... ( 오필리아의 방에 직접 찾아오기도 하는 걸 보면 ) 끝내 오필리아가 직접 행동을 하도록 요구하고 자신은 한 발 물러나 있는 것도... 두 개의 나선이 끝내 이어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판이라는 존재의 애매함처럼 ( 나무도 아닌 것이 양도 아닌 것이.. 실은 이 넘이 사악하게 변할 줄 알고 기대했었습니다. --; ) 두 가지 이야기의 나선은... 마지막 접점의 기회를 잃고 완전하게 분리됩니다. 판이 대표하는 마법의 세계가 단지 오필리아의 망상이었는지 아니면, 현실 세계에 잠깐 머물 뿐이었던 공주가 제 자리를 찾을 것인지는... 관객의 판단에 맡기는 결말에도 약간의 애매함이 남아 있습니다.
판타지에 대한 다른 접근
'판타지'란 말은 따지고 보면 현실과 차별화되는 상상의 세계... 즉, 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정형화 될 수 없는 환상의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보면 "판타지의 전형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모순된 얘기가 되죠... 아쉽게도 현재의 문학, 만화, 애니메이션, 심지어 영화와 게임에 이르기까지... 보통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판타지의 모습은 꽤나 정형화된 편입니다. 용과 기사, 엘프와 은빛 갑옷이 나오는 판타지는 그렇다 치고, 그 위에 살짝 현대의 옷을 입혀서 시간 이동, 차원 이동을 한다거나, SF등을 엮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배경과 소재, 설정을 바꾼다고 판타지의 내러티브가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겠죠. 그렇기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판타지가 보여줄 수 있는 상상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기존의 판타지의 틀에 안주하려는 작가들에 대해 고운 시선을 보낼 수가 없네요.
"판의 미로" 역시 기존 판타지의 틀을 비틀고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악이 불분명해 보이는 요정의 존재, 때로는 잔혹한 환상 세계의 존재들의 묘사라든가, 고어스러운 장면과 함께 그려지는 가혹한 현실에 환상 세계의 힘이 끝내 미치지 못한다든가, ( 결국 현실의 문제는 현실 세계에 머무른 사람들이 마무리를 짓도록 내버려두죠. ) 환상의 이야기 전체를 "오필리아의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으로 이끈다든가 하는 점만으로도 다분히 전형적인 배경 이야기와 소재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습니다. "판의 미로"의 작가이자 감독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전작들에서 보여줬던, ( "블레이드 II"의 리퍼와 "판의 미로"에 등장하는 괴물은 왠지 비슷한 질감이기도 하죠. ) '깔끔하거나 속 시원하지 못한' 판타지가 펼쳐지는 원색의 배경 덕분에... 뿌연 연기를 피우며 폼을 잡는 몽환적이고 '뻔한' 판타지와는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습니다.
물론 전형성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울고불고 극장을 빠져나가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고, 말레이지아에서는 잔혹한 묘사(?) 때문에 상영 금지가 되는 일이 있었지만... 막상 영화를 보다보면 "판의 미로"의 이야기가 생소하거나 난해한 이야기를 던지지는 않습니다. '다른 접근'이 간혹 낯설게 느껴질 뿐...'이야기'를 못 따라갈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다른 접근, 낯선 시간, 상상의 한계를 넓히는 것이 결코 불친절하게 설명을 생략하거나, 내러티브를 무너뜨리거나, 듣도 보도 못한 소재와 사건을 나열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판의 미로"는... '다른 점이 있다'는 정도만 생각하고 '헐리우드에 익숙해진' 안경만 조금 고쳐쓰면... 마음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한 편의 영화일 뿐입니다.
다소 우울함, 재미 있음
복잡한 사설을 뒤로 하고, "판의 미로"를 간단하게 평하자면 위의 소제목과 같이 두 가지로 요약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판의 미로에 들어선 것처럼... "판의 미로"의 전체적인 톤은 다소 우울합니다. 음악과 화면이 가세한 이야기의 우울함은 '침울하다'는 분위기에 가깝기도 합니다. 비달 대위에 의한 양민의 죽음... 만드라고라의 죽음과 괴물에 의한 요정의 죽음... 의사 페레이로, 카르멘 등 주요 인물의 죽음... 그리고, 주인공인 오필리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죽음을 접하면서 우울함을 느끼지 않는 관객은 많지 않을 것 같네요. 심지어는 '첫번째 과제'에서 벌레들과 뒤범벅이 되어 진흙탕을 뒹굴고, 끝내 거대한 두꺼비를 허무하게 죽여버리는 장면에서... 감독이 의도한 '잔혹 동화'의 연출은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우울함과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분명 재미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저 예산의 영화지만 CG도 어색하지 않고, 다소 어눌한 오필리아의 연기도 재미 있습니다. ( 이 아가씨가 현재 만 열 두 살, 영화 촬영 당시 만 열 살이었다니 -O- ) 악역이거나 배신을 때릴 것만 같았던 판의 캐릭터도 재밌고, '흔한' 판타지를 다소 벗어난 장면이 연출될 때마다 흥미를 느끼기도 합니다.
위의 주의 사항을 염두에 두고, 무거운 주제는 머릿 속에서 지운채... 잔혹한 장면에서 살짝 시선을 피한다면...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영화를 즐기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 현실의 이야기를 완전히 제거한다면... "온갖 고난을 겪고 지하 세계로 돌아와 왕좌에 앉는" 해피 엔딩의 판타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
상당히 좋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홍보의 대실패로 어긋나버린 수작 "판의 미로" 다행히 '비교적 튼튼한 구성으로' DVD가 출시되었으니 구입해서 감상하실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그.러.나. 무려 제목에도 적어 놓은 "오필리아의 책"이나 별책부록 '열쇠'는 생각보다 실속이 없으니... -O-a 서플먼트에 많은 기대를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종합적으로 봐서... 케로군의 평점은 10점 만점에 7.5점!! 판타지의 새로운 시도에 관심이 많으신 분께는 9점!! 해리 포터류나 반지의 제왕류에 열광하시는 분께는 6점!! 헐리우드의 호쾌한 영화를 선호하는 분께는 4점!!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