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에 관심을 가지고 어느 정도 관전을 하셨지만, 아직까지 영혼을 빼았길 정도로 빠져들지는 않으신 예비 F1 팬분들로부터 가끔 이런 질문을 듣습니다.
1년에 한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십 수 번( 올해는 19번이나! ) 씩 열리는 그랑프리인데, 한 F1 그랑프리에서 우승한 드라이버와 팀원들이 왜 그렇게까지 흥분하며 기뻐하는가?
아마도 많은 분들이 같은 느낌으로 이런 의문을 품고 계시지 않을까 싶은데, 딱히 속시원한 대답을 정리한 곳이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케로군이 이 질문에 답해보기 위해 먼저... 한 번의 F1 그랑프리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가장 먼저, 당연히 훌륭한 드라이버가 필요합니다. 최고 중의 최고를 뽑아 올라가는 피라미드 같은 드라이버의 세계에서 선별되고 선택되어진... 신체적인 조건, 본능적인 드라이빙 감각은 물론, 머신과 작전을 이해하는 명석한 두뇌까지 동시에 요구되는... 걸르고 걸러진 최고의 능력을 보유한 드라이버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런 훌륭한 드라이버에 걸맞는 훌륭한 머신이 필요합니다. FIA가 제공하는 까다로운 규정에 동일하게 맞춰져 만들어지면서도 남들보다 탁월한 퍼포먼스를 낼 수 있어야 되고. 매 주 조금이라도 빨라지기 위해 쉴 새 없이 설계가 변형/업데이트되는... 강력하고 빠르면서도 안정적인 성능을 낼 수 있는 머신이 필요합니다.
그와 동시에 훌륭한 팀원들과 피땀 흘리는 노력이 필수적입니다. 각 써킷에 맞는, 드라이버의 상태에 맞는 미세한 조정을 바꾸기 위해 수 십 명의 스탭이 쉴새 없이 작업하고... 번개같은 핏스탑으로 시간을 벌기 위해 피나는 훈련도 병행합니다. 때로는 주말 레이스가 펼쳐지는 내내 밤잠을 설치면서 머신을 조정하는 작업으로 녹초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조건이 모두 갖춰져서 이른바 '우승할만한 자격'이 있더라도... 퀄리파잉이나 일요일 그랑프리 레이스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단 한 번의 실수, 단 하나의 이상이 있다면 그 역시 F1 그랑프리에서 우승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미 올 시즌 초반 많은 F1 팬들이 목격했던대로 첫 그랑프리인 바레인GP에서 수 천 개 부품 중 하나인 점화 플러그 단 한 개의 이상때문에... 내내 선두를 지키던 베텔이 우승을 헌납하고 4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고, 두번째 그랑프리 호주GP에선 핏스탑에서 4초동안 휠을 갈아끼우다가 미세하게 휠너트를 덜 조인 결과... 역시 주말 내내 선두를 달리던 머신의 브레이크 이상을 초래해 베텔은 결국 리타이어하고 말았습니다. 그 외에도 단 하나의 작업 실수, 단 하나의 작전 미스로 우승을 놓친 예는 수 없이 많죠.
드라이버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한 시간 반 이상의 레이스를 펼치는 도중... 단 10cm의 코스 이탈, 단 수 km/h의 속도 조절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단 한 번 때문에 머신이 스핀하고, 안전벽에 충돌하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버가 내던져지는 환경은 가혹하기 그지 없습니다. 옴짝달짝할 수 없는 뜨거운 콕핏에 고정되어 전후좌우로 3G 4G로 충격을 받아가면서도... 수백 km/h에서 급가속, 급감속을 반복하면서 다른 머신과 몇 cm 간격으로 지나가면서도... 결코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것이 F1 드라이버입니다.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드라이버 자신과 머신, 팀에 아무 문제가 없더라도... 다른 머신의 실수로 충돌하거나, 이물질을 밟고 머신의 컨트롤을 잃거나 하는 경우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갑자기 비가 내리거나 그친다면 가장 빨리 적절한 타이어로 바꿔줘야 하며, 세이프티카가 등장했을 때 손해를 보는 위치에 있으면 안됩니다. 이도 저도 아닌 경우에도 지난해 마싸의 부상처럼, 어디선가 날아온 부품이나 돌멩이 하나가 우승컵을 빼앗아갈지도 모릅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F1 우승의 기록은 많은 이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는데요, 대표적인 예로 2009년 말 F1 진출 철퇴를 발표한 토요타의 경우... F1 팀 중 가장 많은 예산을 쏟아 부으며 모든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8년 동안 단 한 차례의 그랑프리에서도 우승을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현재의 F1 드라이버를 보더라도 현역 24 명의 F1 드라이버 중 단 한 번이라도 우승을 차지했던 드라이버는 11 명에 불과한 것은 물론... ( 그 중 세 명이 딱 한 번 우승을 차지했었습니다. ) 팀으로 봤을 때 윌리암즈 같은 경우 2005년 이후 단 한 차례도 우승을 하지 못했으며, 토로로쏘는 2008년 베텔의 1승이 팀 역사상 단 한 차례의 우승에 불과했다는 점 등에서... ( 전신 미나르디 시절 포함 25 시즌을 합쳐서 ) F1 우승이 단지 노력만으로 단지 돈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로 설명하기에 숨이 찰 정도로 길고 긴 이 모든 과정을 이겨내고 경우에 따라서는 하늘도 도와준 팀과 드라이버 결국 우승컵이 주어지게 되다보니, 선두로 달리는 머신이 마지막으로 결승선을 통과해 체커드 플랙을 받는 순간 이런 어려움을 알고 있고 직접 이겨낸 드라이버와 팀원들은 광적으로 흥분하고 기뻐할 수 밖에 없겠죠.
그리고, 자신이 응원하는 팀과 드라이버가 그 기쁨을 누리는 순간에... 그들과 동화되었던 F1의 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열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F1에 열광하고 좋아하는데... 위에 적은 장문의 설명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장면, 그 소리, 그 느낌을 말로 설명하기는 참 어렵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말로 아무리 설명한들... 현장의 그 느낌을 무엇으로 대신하겠습니까? ㅠ.ㅠ
그런 면에서 아래의 2009년 Petronas 광고는 직접 F1을 관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부족하나마 그 어떤 다른 설명보다 강렬하게... F1의 느낌을 전달할 수 있도록 잘 만들어진 광고가 아닌가 합니다. 작년 Starsports에서 F1 중계할 때 참 줄기차게 보면서도 늘 마음에 들어했던 광고였는데요... ( 슈미의 복귀를 전면에 내세운 2010 광고보다 2009 광고가 훨씬 맘에 들고 기억에 남습니다. )
텍스트들이 하나같이 멋있지만, 무엇보다 광고의 말미에 적힌 문구처럼
Human willpower. How amazing.
이 말 한 마디가 우리가 F1에 흥분하고 열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네요.
이번 주말에도 그 amazing을 느끼기 위해 중국GP는 빼놓지 말고 보아야겠죠. 그리고, 올 가을 한국GP의 현장에서 그 amazing을 제대로 느끼는 것도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