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처음으로 홍보 영상을 보았을 때도, 신림사거리를 지나며 포도몰에 크게 걸린 대형 포스터를 보았을 때도... 이 영화에 대한 기대치는 0에 가까웠습니다. '내가 왜 이런 영화를 보러 가겠냐'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가 어디선가 이쪽저쪽에서 이 영화 의외로 괜찮다는 얘기를 하나둘 듣다 듣다가... 어느날 갑자기 '절대 극장에서는 보지 않을 줄 알았던' 영화 "킥애스( Kick-Ass )"의 티켓을 예매하고 말았습니다. ;;;
그런데, 너무나 뜻밖에도( 이 영화를 추천했던 사람들의 말대로 ) 킥애스는 정말 재밌었습니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기 전의 케로군과 같은 관객들의 '엉덩이를 걷어차주듯이' 통쾌한 재미를 선사해주더군요. 작년 연말부터 많은 재미있는 영화들을 만나왔었지만... 재미로만 따진다면 킥애스가 이전까지 가장 재밌는 영화였던 전우치에 버금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감독과 연출
이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도맡은 매튜 본( Matthew Vaughn )이란 감독은, 솔직히 말하면 케로군에겐 사전 정보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작으로 2004년에 Layer Cake와 2007년 Stardust의 두 연출작이 있지만... 모두 보지 못했네요. ;;; 덕분에 매튜 본 감독의 세번째 연출작인 킥애스를 전작의 연출과 엮어서 이야기할 거리는 없습니다. -_-; 다른 상당수의 영화 관객들에게도 매튜 본 감독은 연출력보다는... 독일 슈퍼모델 클라우디아 쉬퍼의 남편이라는 가십이 더 널리 이야기되던 것 같더군요.
하지만, 전작이 어땠는지와는 무관하게... 킥애스의 각본과 연출은 아주 뛰어납니다. 전형적인 이야기의 틀이나 관객의 기대를 허무는 도발적인 구성과 에피소드들을 제공하는 동시에... 또 한 편으로는 정극에 가까운 스토리의 착실한 진행과 함께, 잘 배치된 복선과 철저하게 준비된 영화적 장치들이 아주 잘 어울리면서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킥애스의 장점은 기존의 슈퍼히어로물을 풍자하고 틀을 허무는 듯 하면서, 자연스럽게 조금 더 큰 울타리 안에서 슈퍼히어로물의 전형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인데요... 한마디로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영화'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객을 기대하게 만들고 그 기대를 철저하게 무너뜨리거나 드물게 기대를 충족시켜준다든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든가 하지만... 결과적으론 관객들이 정말 바라던 방향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어가는, ( 큰 틀에서 ) 지극히 전형적인 이야기의 구조는 크게 훼손시키지 않았다는 게 또 재밌습니다.
케로군이 킥애스에서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와 연출이라면... '악당'보다 더욱 잔인하고 인정사정 없는 슈퍼히어로 역할의 캐릭터를 묘사한 장면들과, '철저하게 현실적인'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군중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 그리고 지극히 비현실적이지만 슈퍼히어로를 원하는 관객을 안도하게 하는 마지막 하이라이트들이었습니다. 물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진정한 주인공 '힛걸'의 캐릭터와 멋진 액션에도 최고의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죠. 힛걸에 대한 이야기는 '배우와 연기'에 대한 이야기에서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킥애스는 액션 영화, 특히 슈퍼히어로 영화로서 아주 훌륭한 영화지만... 빵빵터지면서 홀가분한 '코메디'를 기대하셨다면 다소 실망할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도 듭니다. 영화 초반부터 종종 웃음이 터지는 장면들이 분명 존재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가 웃기기 위한 영화는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웃음을 유발하는 어의없는어이없는 장면과 캐릭터들을 보면서, 헛웃음을 나오게 하는 지극히도 냉정한 현실의 사람들이 생각나면서... 더욱 진지해지기도 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킥애스는 코미디가 아닌 진지한 액션 영화로 걸작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우와 연기
일단 이 영화의 화자이자 형식상의 주인공은 Aaron Johnson이 연기한 데이브/킥애스입니다만, 주인공 역할을 수행한 배우도 사전 정보 부족하기로는 감독의 경우 못지 않았습니다. -_- 1990년생으로 젊은 나이에도 불구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고는 하는데, 케로군의 기억에 남는 전작은 없습니다. ( '일루셔니스트'에 나왔다고는 하는데 인상적이지 않았는지 기억나지는 않네요 ㅠㅠ ) 하지만, 어쨌든 주인공 데이브/킥애스의 연기는 훌륭했습니다. 물론, 그 훌륭했다는 게 멋있었다거나 감동적인 것은 아니지만( 전혀 그런 캐릭터는 아니죠 ) 찌질하고 천박하면서도 보통 사람 수준의 인간적인 면을 잘 드러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멋있거나 대단해 보이지 않는 연기가 결코 쉬웠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전반적으로 이름값 좀 한다는 배우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킥애스에서 나홀로 등장하는 단 한 명의 A급 배우가 바로 데이먼/빅대디 역으로 등장한 Nicolas Cage입니다. 한 때 데이먼/빅대디 역으로 브래드피트가 캐스팅될 뻔 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캐서방과 아주 잘 어울리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다른 배우에 대한 아쉬움은 남지 않습니다. 감독이 특히 캐서방의 캐스팅을 강력 주장했다는데, 브래드피트가 제작자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이 또 재밌네요.^^ 큰 키에 다부지지 못해 보이는 외모가 캐릭터와 아주 잘 어울리기도 했고, 특유의 살짝 어리벙벙하면서도 다소 입체적인 연기에 적절한 원숙한 연기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캐릭터는 앞서 잠깐 언급했던 '민디/힛걸'인데요, 힛걸을 연기하면서 엄청나게 강력한 인상을 남긴 배우 Chloe Moretz는 놀랍게도 1997년 2월생(!)이랍니다. 만 열 세 살의 아역배우는 킥애스에서 런닝타임 내내 믿을 수 없는 '원숙한' 연기를 보여주는데, 이전까지 인상적인 아역 연기자들이 '어린 아이다운 연기'로 감동을 줬다면( 다코타 패닝의 경우처럼 ) 힛걸로 보여준 모레츠의 연기는 어린 아이라기보단 그저 한 명의 배우의 연기이기도 하고, 성인 여성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액션 연기였다는 점에서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입만 열면 터져나오는 쿨하고 시크한 대사와 천진난만함과 잔인함을 오락가락하는 표정 연기도 일품이고... 킥애스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난도질' 액션에 이르기까지 빈틈이 없어보입니다. 국내 배우들이 특히 심하지만 많은 여성 배우들이 총기 액션에서 매우 어색한 모습을 보이는데, 총이면 총, 칼이면 칼... 힛걸은 각종 다양한 무기들을 다루면서도 눈빛 하나 자세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른 뺨치는 연기를 보여줬던 Chloe Moretz가 앞으로 어떻게 성장하면서 어떤 멋진 연기를 보여줄지 정말 기대가 큽니다.
킥애스에는 이 외에도 많은 배우들이 다양한 조연으로 등장하는데, 디아미코 부자, 특히 킥애스의 맞수로 등장한 레드미스트역의 Christopher Mintz-Plasse의 연기가 기억에 남고... 그외 나머지 조연들도 역할에 충실하면서 크게 눈에 걸리지 않는 무난한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 하지만, 워낙에 위의 네 캐릭터의 비중이 크다보니 상대적으로 인상 깊지는 않더군요. )
아무래도 캐릭터의 비중이 강한 슈퍼히어로물이면서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이기도 하기 때문에... 연기자들의 연기력이 특히 중요했던 킥애스는, 결과적으로 배우들의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하고 적절한 연기 덕분에 아주 재밌어진 것 같습니다. 특히, 젊다 못해 어린 배우들이 중심 캐릭터들로 대거 배치되어 호연을 보여줬기 때문에, 시리즈가 계속되면서 어떻게 발전할지 기대가 굉장히 큽니다. 물론 이 영화 최고의 히로인인 힛걸의 캐릭터가 어떻게 발전할지가 제일 궁금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볼거리와 이야깃거리
킥애스는 기존의 슈퍼히어로물과 크게 차별적인 패러디물의 인상을 주면서도 많은 슈퍼히어로물을 만들어낸 Mark Millar - John Romita, Jr.의 작품으로... 슈퍼히어로물의 종가 중 하나인 Marvel Comics에서 출간되었던 만화라더군요. 정통(?) 히어로물을 쓰고 그리던 사람들도... 킥애스처럼 삐딱하면서도 좀 더 와닿는 슈퍼히어로물에 대한 동경은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영화내내 다양하면서도 적절한 느낌의 노래들을 들려주던 킥애스의 음악은 엔딩에서는 많이 듣던 목소리를 들려주는데, 엔딩 크레딧을 확인하니 정말로 MIKA가 엔딩을 장식했더군요. MIKA의 열 번째 싱글이라는 'Kick Ass'는 다음 달에 영국에서 발매가 된다고 합니다. 이 음악도 꽤 괜찮던데 나중에 영화 사운드트랙이나 MIKA의 싱글 중 하나는 구매해야겠습니다. ^^
CG가 몇 장면 들어가기는 하지만, 꽤나 현실적인(?) 스토리 덕분에 영화의 제작비는 채 3천만 달러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영화의 매출은 이미 제작비를 크게 상회했으니 속편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비싼 배우(?)가 별로 등장하지 않은 것이 영화 제작비를 낮추는데 한몫하지 않았나 싶네요. 또, 감독은 DVD가 출시될 때 삭제된 18분을 추가한 감독판을 내놓는다고 하니, 아마도 DVD와 함께 출시될 킥애스 블루레이를 통해 극장에서의 감동을 꼭 다시 느껴보고 싶습니다.
한 편, 과도하게 잔인한 장면 덕분에 일부에서는 킥애스를 상당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 닌자어쌔씬이나 킬 빌과 비교하면 그 폭력의 정도는 살짝 덜한 편입니다. 그러나 보통 12세 15세 등급의 슈퍼히어로물과 비교한다면 굉장히 과격한 난도질과 총격씬이 등장하고, 무난한 코메디를 예상하고 극장을 찾으실 분들은 간혹 깜짝 놀라시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종합하자면...
킥애스는 특히 기대하지 않고 극장을 찾았기 때문에, 영화를 감상한 뒤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것처럼 크게 기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소 잔인한 장면과 의외의 연출 때문에 깜짝깜짝 놀랄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그 어떤 슈퍼히어로물보다 깊이 감정이입이 되는 진지한 슈퍼히어로물이었습니다.
특히 배우들의 연기에선 그 어떤 흠도 잡을 수 없어서 감동적이었고, 음악, 영상미, 구성, 게다가 영화를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까지 모두 훌륭했습니다. 물론,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서라도 슈퍼 히로인 힛걸 한 명만으로도 볼 만한 영화로, 액션물을 좋아하시는 모든 성인 관객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