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아랍,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난민, PLO, 인티파타... 이런 단어들은 왠지 피하고 싶은, 편견에 도전하고 싶지 않은 단어들입니다. 그렇게 조용히 외면받으며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 아니 '불편한 현실'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불편한 현실'에 대해서 저자인 조 사코( Joe Sacco )는 '코믹 저널리즘'의 자세로 신중한 접근을 합니다. 2002년 국내에 소개된지 6년 만에 읽게된 "팔레스타인( Palestine )"은 '코믹 저널리즘'과 팔레스타인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불편한 현실'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저널리즘
단순히 '언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 '뉴스를 다루는 행위'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저널리즘( journalism ).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저널리즘을 단순히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로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실의 묘사에는 관점이 반영되고, 모든 사건에는 이유와 결과, 그리고 이어지는 파급 효과가 있으며, 하나의 사건, 사고가 단편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팔레스타인'의 소재가 된 중동.... 중동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모든 것이 현재 진행형인 팔레스타인. 이런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 저널리스트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물리적인 사고가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담아낸 기사가 아무리 스스로의 진실에 가깝더라도 독자에겐 설득력을 가지기 여러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시온주의의 입장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한 유태인들을 존경할만한 모델로 묘사하든, 팔레스타인인을 유태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연약하고 지고지순한 희생자로 묘사하든... 독자는 편한 소파에 앉아 손쉬운 양비론과 양시론을 들이댈 수 있습니다.
저자 조 사코가 묘사하는 팔레스타인은... 그런 면에서 꽤나 용의주도합니다. 스스로를 비겁하고 편견을 가지고( 잘 버리지도 않고 ) 연약한 제3자의 위치에 고정시키고... 유태인도 팔레스타인 사람도 편들지 않습니다. 유태인은 처절하게 남의 땅에 들어와( 디아스포라 어쩌구 하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한 ) 그저 평범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파괴하고 괴롭히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지고지순하고 선하고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바쁘고, 당파를 만들고, 남성은 여성을 억압하고, 때론 공격적으로 저항합니다. 심지어는 어지간한 3류 신파극의 설정으로도 한 쪽 편을 들어줄만도 한 상황에서도... 극중의 조 사코는 속 편한 제3자의 위치를 고수하며 자신의 안위만 걱정합니다. 그는 방관자이며,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는( 그럴 의지도 없어보이는 ) 한 명의 미국인일 뿐입니다.
그렇게 그려진 팔레스타인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독자가 조 사코의 의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퇴로가 막힌 셈이죠. 철저하게 중립( 그런 것이 존재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을 추구하는 가운데... 독자가 도달하는 결론은 극히 제한됩니다. 케로군이 책을 읽고 도달한 종착점도 조 사코의 의도( 아마도 )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코믹 저널리즘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을 굳이 다루게 된 이유는... '코믹 저널리즘'이라는 것이 가능하긴 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합니다. 케로군이 누누히 얘기하는 것처럼... 엔터테인먼트( 만화 )는 '재밌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널리즘의 고유 특성은 '재미 면역'이며... '코믹'과 '저널리즘'이라는 단어는 접점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사코는 능청스럽게 '코믹 저널리즘'을 시도했고... 보스니아 내전과 관련된 몇 권의 책들 외에 우리가 접하게 되는 이야기는.... 하필 ( 외면하고 싶었던 ) 팔레스타인입니다.
결과적으로 그가 성공했느냐고 묻는다면... 케로군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책 속의 화자가 말하듯... '총격전이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재미있는 장면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케로군을 포함하여 ) 독자가 기대하는 화끈한 장면이라는 것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폭력적이고 가장 위험한 팔레스타인의 거리에서 발견하는 장면은, 그다지 재미있는 것이 없습니다. 과연 그렇게 재미있는 것이 없는데도 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누구든 어렵다고 답하겠죠.
그렇지만...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어서...( 혹은 호기심이라도 ) '불편한 현실'에 관심을 표하고 책장을 넘기다보면... 자연스레 극중 조 사코에 동화되어 팔레스타인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앞서 얘기했던 재미와는 또 다른 의미의 '재미'가 없지 않다는 얘기죠.... 결코 '누구에게나 어필할 수 있는' 재미는 아니지만... 타르코프스키의 예술 영화보다 사람을 휘어잡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 '예술 영화' 팬들께는 죄송합니다 ㅠ.ㅠ ) 그것이 단순한 '사실'의 힘인지... '작가'의 힘인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겨야겠죠.
그리고,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의 현실에 대한 구구절절한 얘기는 케로군이 따로 다루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특히나, 유태인들의 영향력이 지대한 서구 유럽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시온주의자 뺨치는 일부 몰지각한 기독교인들의 친 이스라엘 정서 때문인지... 우리 주변에 심겨진 팔레스타인( 그리고, 아랍과 무슬림 )에 대한 이미지와 편견은 생각보다 크기 때문에, 어지간한 설명으로는 그 패러다임을 옮기기가 쉽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일단,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을 읽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네요. ( 배경 지식이 전무하신 분들을 위해 책 말미에 해설도 약간 담겨있습니다. )
분명한 것은 '중동 유일의 민주 국가'로 팔레스타인을 강제 점거하고 세워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실상은 사상 최악일지도 모르는 폭력과 살인, 비인권적인 억압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변에서 억압 받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비참한 현실은... 책에서 묘사하듯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이름 모를 옆집 아저씨의 아침 식사 메뉴보다 하찮은 일이죠. 더더욱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점은....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겪게 되는 풍파의 패턴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국가 질서를 위해(?) 공권력을 휘두르는 자들과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들의 갈등이... 왠지 남의 얘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 이쯤되면 제3자가 되어 팝콘 먹으면서 구경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다 읽은 독자는( 케로군도 ) 여전히 극중의 화자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외면하겠죠. 이런 이기적이고 현실도피적인 독자들을 뻔히 알고 있을텐데 저자가 굳이 팔레스타인을 화두로 던진 이유는... 아마도... 어느날 문득 웨스트뱅크의 소식이 TV를 타고 흐를 때... 한 번쯤 이 만화의 한 장면을 떠올려줬으면 하는 바램... 정도가 아닐까요? 팔레스타인은 가공의 잔혹극이 아니라... 논픽션으로 분명히 실존하는... '불편한 현실'입니다.
뭐라 뭐라 해도... 솔직하게 얘기해서 '팔레스타인'의 그림이 편하고 정감이 가는 것도 아니고, 텍스트가 쉽게 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내용의 무게는 이루말할 수 없이 무겁습니다. 만인에게 권하고 재미있다, 읽어보면 즐거울 것이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만화라면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은 썩 잘 어울립니다. 별점 다섯 개 만점에 네 개를 주면서 추천을 하는 책이지만 재미만을 따져서 별점을 준다면 별점 한 개를 받을까 말까하다는 생각입니다. ^^; 물론... 케로군이 말한... '또 다른 의미의 재미'를 느끼셨다면... 케로군과 같은 인종일지도 모르니 언제 한 번 정신 감정을 받아보심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