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까지, 올 여름 개봉해서 대단한 흥행을 거둔 한 편의 국산 판타지 영화 때문에 말들이 많았습니다. 케로군도 문제의 영화에 대해서 할 말이 정말 많았지만, 몇 가지 이유로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뒤에 언제 한 번 그 이야기도 꼭 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문제의 판타지 영화에 대해서 각종 언론과 게시판에서 많고 많은 논의가 오갔는데, 그 가운데 '괴수 영화'라는 "장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몇 차례 목격했습니다. "장르 영화".... 이 말만 가지고도 장문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텐데... 각설하고... 무슨 얘기를 하나 보았더니.... '장르 영화'인 '괴수 영화'라면 괴수가 등장해서 이야기고 뭐고, 설정이고 뭐고 때려부수기만 하면 된다는 근거를 알 수없는 주장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뭐, 그런 말 한마디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유가 있겠지만, 단지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무려 다른 사람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고 있더군요... -O-
대부분의 장르 영화에서 '정극'이나 '드라마'와 비교해 절대적인 서사의 양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장르 영화가 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장르 영화가 되기 위한 틀과 전형적인 모습에서 오는 한계를 안고 자신만의 색깔을 나타내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한 고민들을 해야 할지는 쉽게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마치 '장르 영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뉘앙스를 담아 "장르 영화는..." 운운하면서 이야기 하는 게 결코 달갑게 들리지 않는군요.... ;;;
영화에 대한 이런 오해는 종종 다른 대중 문화에도 전이됩니다. 만화의 경우에도 영화와 같은 편협한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도 적지 않죠. 장르 '만화'나 장르 '소설'에 대한 비하와 오해는 장르 '영화'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네요. 그래서, 한 번 그런 '장르 만화'에 대해 변호 아닌 변호를 하는 기분으로 굉장히 전형적인 장르 만화 한 편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야기노리히로 (八木教広)" 작 "클레이모어 (CLAYMORE)"는 전형적인 장르 만화입니다. 무리해서 그 장르를 규정한다면 "일본 식 판타지 활극" 정도가 될까요? 전형적인 요소들이 배치되어 있고 늘 듣던 이야기의 흐름, 본 적 있는 장면 연출이 가득한... 요점 정리만 하고 보면 특징을 찾기가 어려운 정도로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 '클레이모어'를 읽으면서 케로군은 '잘 만든 장르 만화'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째서 케로군은 그렇게 느끼게 되었을까요? ( 아래 칼럼 중에는 스포일러 또는 네타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전작 엔젤전설
'야기노리히로'라는 작가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1993년 작 "엔젤전설 (エンジェル伝説)"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데뷔 이후 첫 연재작으로 약 7년 간 소년 점프에 연재되었는데 그 때문인지 마치 우라사와나오키 씨의 '야와라'처럼 연재가 계속 되면서 그림이 안정되고 자신만의 틀을 잡아 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내용도 데뷔하는 작가다운 신선한 코메디였고, "키에에~~"하는 비명(?) 소리를 트레이드마크로 가진 소심한 주인공 '키타노' 군과 그를 둘러싼 엉뚱한 친구들과 황당한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재미있는 만화였습니다. 단순히 재미있는, 그냥 웃기는 만화라면 이것 말고도 많이 있겠지만... 어디서든 책을 펴들었다가는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확실히 웃기는' 만화는 많지 않을 것 같네요.
그런데, 이 엔젤전설 역시 어느 정도 코메디라는 장르의 전형을 따르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의도가 주변 사람들에게는 엉뚱하게 반대로 전달되는 점이나, 우연하게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원치 않았던 위기에 빠지는 점, 또 주인공의 숨겨진 능력이 드러나는 반전 같은 것들은 왠만한 코메디 장르에서는 빠지지 않는 요소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전형적인 하나의 코메디 개그 만화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 "엔젤전설"로 기억에 남을 수 있었던 건 장르의 특징을 가장 확실하게 살려서 웃길 때 제대로 웃길 수 있는 상황 설정과 '큰 웃음'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독특한(?) 캐릭터 설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웃을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힘과 호기심을 유발하능 능력도 빼놓을 수 없겠군요.
엔젤전설의 뒤를 이어서
'확실히 웃겼던' 엔젤전설의 뒤를 이어 야기노리히로 씨가 선택한 두번째 연재 작품은, 매우 진지한 장르 만화 "클레이모어"였습니다. 그리고, '클레이모어'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일본 식 판타지 활극"이라는 전형적인 특징을 따릅니다.
칼과 괴물( 요괴 )이 횡행하는 중세 판타지 풍의 배경 위에 과거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주인공의 등장에서 시작해서, 동반자이자 주인공이 보호해야 되는 인물의 등장. 강력해 보였던 주인공을 능가하는 적의 등장과 주인공의 성장, 보다 강한 적과 경쟁자들의 등장, 등장, 성장, 성장... 적이라고 생각했던 존재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무언가 시한부라든가 한계가 정해진 주인공의 비극적 운명... 어느 순간 시간을 건너뛰어서 강력한 능력을 지니게 된 주인공... 숨겨졌던 과거의 비극, 조직의 숨겨진 비밀, 그리고 기타 등등의 반전(?)까지...
고유 명사와 상황 설정을 생략하고 개념만 설명하면, 너무 전형적이다 못해 흔해빠지고 뻔한 이야기 남습니다. 판타지 격투 활극이라면 "드래곤볼 같다"는 한마디로 필이 꽂히는...그런 종류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이모어'는 이런 한계를 매우 잘 극복하고 있기 때문에 그저 흔하디 흔한 장르 '만화' 중 하나로 여겨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 그래서 재미있다고 느끼고 있는 거겠죠... ^^; )
'클레이모어'가 왜 재미있느냐는데에는 의견이 분분하겠습니다만, 케로군은 '엔젤전설'의 예를 그대로 대입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신비롭거나 신기하거나, 호감이 가거나 꺼림직하다는 식의 재미있는 캐릭터 설정.... 박진감 넘치거나 긴장감 넘치는 전투 상황과 위기 상황의 설정... 그리고, 알 수 없는 결말을 향해 무모한 듯 유려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와 내러티브가 가진 힘과 그 이야기에 대해 독자가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능력.... 정리하고 보면, 위에서 '엔젤전설'에 대해 좋다고 얘기하던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요소들은 단어로 떠들기는 쉽지만, 실전에서 보여주기는 매우 어려운 능력들이죠. ( 그게 쉬우면 저도 만화가 하겠습니다. ^^; )
'클레이모어'의 주인공 '클레어'가 속한 '조직'의 구성원이 전부 여성인 것부터 재밌습니다. ( 그것도 '아마존의 여전사' 같은 느낌이 아니라 미소녀!!! 뿐입니다... +ㅅ+ ) 실제로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대부분의 캐릭터는 여성들 뿐이며, 간혹 등장하는 조연 남성 캐릭터들은 끝내 큰 비중이 실리지 않고 무대 밖으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조직'의 구성원들의 태생적 문제점( 반인반요...라는 )은, 판타지적인 설정이면서도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일반적인 물음과 유사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처음 등장했을 때만해도 얼음장같이 차가웠던 주인공이 점점 부드러워지더니, 나중에는 한 소년을 구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된다는 점이나, 그런 '클레어'의 모습이 과거 그녀를 구한(?) '테레사'의 모습과 닮아있다는 이야기 등은...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독자의 감성을 쉽게 자극합니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늘어지는 드라마로 푸는 게 아니라, 갖가지 검술이 난무하는 액션 활극으로 풀고 있기 때문에 지루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누구나 알만한 굉장히 보편적인 주제와 이야기들을, 사설을 늘어놓지 않고 흥미 진진하게만 이야기하고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꾼, 그림꾼이라면... 이렇게 재미있는 '장르 만화'를 그릴 수 있겠구나... 하는 말도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 그리고, 그런 이야기꾼과 그림꾼은 분명 흔하지 않죠.... ) 야기노리히로 씨의 '엔젤전설을 통해 완성된 그림'과... 역시 '엔젤전설'에서 보여주었던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이 합쳐져 완성된 '클레이모어'는 그렇게 보편적으로 재미있을 법한 만화가 되었습니다.
대중 문화 상품 '클레이모어'
그리고, 이제 다시 뒤집어서 이야기를 해 보죠. '잘만든 장르 만화'가 독자를 만족시키고 재밌다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단지 장르적 관습이나 익숙한 전형을 따르는 것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독특하면서도 흥미 있는 캐릭터 설정이나 상황 설정, 보편적인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와 그것을 이끌고 가는 내러티브... 보여지는 상품이라면 이런 것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그림이나 화면 역시 중요하겠죠. 그런 것들을 그저 아무렇게나 늘어놓는 게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배치하고 구성하고, 잘 연결 시켜주는 능력이 바로 작가의 능력이란 얘기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르 '만화'든 '영화'든 '소설'이든, 대충 비슷한 요소를 끌어모아서, 몇 부분만 신경써서 만들면 된다...는 논리는, 저로서는 도저히 곱게 봐줄 수가 없습니다. '잘만든 장르 XX'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시도하고... 또 실패했고... 그러면서도 다들 머리를 짜내고, 고민하고, 피터지게 토론도 하고, 공부도 하는 그런 노력을... 그 노력 전부를 부정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기 혼자 알아보는 순수한 작가주의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 케로군이 한참 떠든 게 한 '장르 만화'에 대해 얘기했던 걸 모르시는 분이 설마 계시지는....;; ) 지극히 상업적이고, 지극히 뻔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 대중 문화 상품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클레이모어'만 봐도... 지극히 대중적인 만화 상품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편집부의 입김이 작용하는 것 같은... 그런 대중 문화 상품이란 거죠.... 그러니까... 제발 대중 문화 상품도 신경 써서 만드는 예를 찾아보고 공부하고... 우리도 잘 만들어보자... 이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클레이모어'가 대중 문화 상품인 덕분에.... 좋은 작품, 나쁜 작품을 가리지 않고 기회만 되면 울궈 먹고 비벼 먹기! 라는 일본 대중 문화 상품의 필수 코스를 그대로 따라서 다양한 상품을 뿜어내고 있더군요... 그 중에 가장 잘 나가는 아이템이 바로 '애니메이션' 클레이모어입니다. 잔인한 묘사 때문에 심야 편성이 되었다던데도... 꽤나 잘 팔립니다. 물론, 상업적인 울궈 먹기를 칭찬하기는 왠지 마음에 걸리지만, 엉터리 상품의 울궈 먹기에 비하면 잘 만든 작품의 재활용은 100만 배 이상 응원해 주고 싶습니다. -_-
대중 문화 상품에 대한 과도한 예찬이나 숭배도 문제지만, 반대로 대중 문화 상품 자체를 과도하게 비하하거나 시장을 낮춰보려는 시도 역시 문제입니다. 특히, 어떤 특정 상품을 과대 포장하면서 다수의 사람들의 노력을 깎아내리는 시도는, 추호도 용납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대중 문화 상품은... 그저 대중 문화 상품으로 소비해줍시다... 좋으면 좋고, 말면 말고... 오케이? 그리고, 제발 열심히 노력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을 억울하게 만들지나 맙시다... 오케이?
여기서 사족!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이런 상업적인 울궈 먹기는 언제나 고객 편이 아니라는 사실!!!! ( 애니메이션은 못 보고 ) 너네 튜브에서 오프닝 PV를 보고 맘에 들어 음반을 사려고 봤더니.... ( 노래 자체도 굉장히 전형적입니다만... -_-... 케로군도 은근히 전형적인 것 좋아하나 봅니다... )
이건 살 수도 없고 안 살 수도 없는.... 같은 맥시 싱글이 무려 세 개!!! 정작 싱글 수록곡은 같고 부록이나 옵션만 다르게 해서.... 순진한 수집 마인드에 불을 붙여버리는 상술이군요.... 으음....
문제의 애니메이션 오프닝 곡, "Nightmare"의 "Raison D'etre"를, 너네 튜브 무자막 오프닝 영상으로 짧은 넘을 골라 붙여 놓겠습니다.
"클레이모어"는 굉장히 재미 있습니다만, 종합적인 평가라든가 하는 관점에서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또 어렵습니다. 일반적이 사람이 재미있게 읽기 좋고, 여러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는 데에서 10 점 만점에 8 점 정도를 줄 정도인 것 같네요. 물론 장르적인 한계를 감안하고 얘기한다면 9 점도 줄 수 있겠고... 이런 장르가 내키지 않는 분은... 5 점 이하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여튼 상업 만화, 대중 문화 상품으로서의 만화, 장르 만화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범인( 凡人 )이 읽기에 이 정도로 잘만든 만화도 많지 않겠다... 하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