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300'의 개봉을 전후해서, "영화 '300'이 이란의 고대를 왜곡했다." "서구 우월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라는 등의 문제 제기와 논쟁이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도 "영화 '300'이 정치적으로 올바른가?"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 해결이 될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재밌는 것은... 출판된지 10년이 되어 고전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르는 원작 만화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게 헐리우드 영화와 '일개' 만화의 차이일까요? -O- ( 만화를 무시하는 미국 영화계의 풍토에 대해 일침을 놓던 프랭크 밀러 씨의 얘기가 생각납니다. )
아마도 미국에서만 인기를 끌었고... 국내만 해도 영화가 아니었으면, 이미 영화로 소개된 '신시티'가 아니었으면... 뒤늦게나마 만화가 출판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만... 유독 '만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정치적인 올바름에 대해서... 그냥 그까이 꺼 대~~~충 넘어가자는 생각이 팽배한 것도 조금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실 만화가 독자에게 주는 영향력은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영향력과 비교할 때...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영향을 끼치는 겉모습은 크게 차이가 납니다만... 양적인 차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독자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친다면... '만화의 정치적 올바름'이란 문제도 그냥 그까이 꺼 대~~~충 넘어갈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
'정치' 두 글자만 나오면 경기를 일으키는 분이 가끔 계시지만... 제가 대학 시절 배운 바에 의하면... 단어 자체가 어렵거나, 일상 생활과 동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정치'란... '정책 결정 활동'이며... '정책 결정'이란 다시... "살아가는 도중 겪게 되는 선택의 순간에 어떤 것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를 가리킵니다. 즉,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의 선택이라든지... '만우절 장난을 칠까? 말까?'의 선택이 결국 일상의 '정치'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300'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레오니다스 왕이 늑대를 잡을 것인가? 도망갈 것인가? 라든가... 전투를 할 것인가? 항복을 할 것인가? 라는 문제 등이 모두 '정치' 활동입니다. 정치가 일상적인 것인지... 일상이 정치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꼭 국가 기관이 등장하고, 전쟁이 등장하고, 혁명이 그려져야 '정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매개체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일까요? 우선, '정치적 중립'과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은 다른 얘기입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매개체는 때로는 편협한 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치적 중립'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당한 방법을 통해 왜곡되지 않은 정보를 바탕으로 매개체가 던져 준 화두에 반응해서 자신의 견해를 보강 또는 변경해서 나름의 정치적 판단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정당한 방법'과 '정보의 왜곡' 여부가 정치적으로 올바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곤 합니다.
만화 '300'
'300'에 대한 논쟁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 스파르타에서는 잔인하고 냉혹하게 전사들을 양성해 왔다. 그런 와중에 서남 아시아를 장악한 대국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한다. 페르시아에 대항해 싸우려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은 정치적 걸림돌에 부딪혀서 소수 정예의 군대를 이용해 페르시아의 대군과 맞선다. 좁은 길목을 막은 스파르타 군은 정예 부대의 힘으로 대군에 맞서지만, 스파르타에서 버림 받은 배신자 때문에 포위되어 장렬히 전사한다. ( 영화는 그 뒤 주저리주저리 더 붙지만, 만화는 이게 전부입니다. )
영화 300에서 발생한 논쟁은... '페르시아'를 현재의 중동( 특히 이란 )으로 이해하고, '그리스'를 소수 정예의 서구 문명으로 이해하여... 야만적인 '페르시아'의 인해 전술에 의한 침략에 대항해... 소수 정예가 맛깔나게 싸운다는 식으로 마음대로 이해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논리적 비약이 심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고만 할 것도 아니긴 합니다. 다만, 완전히 반대의 이해도 가능하다는 점이 문제긴 하죠. 돈으로 화평을 맺으면 친구가 되는 대국 페르시아는... 미국의 모습을 비유한 것도 같고, 몸으로 버티면서 끝내 희생되는 소수는 오히려 미국에 머리 숙이지 않은 죄로 유린당하는 몇몇 나라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한 발 물러서 생각하면... 두 가지 논리 다... 임의의 이해일 뿐입니다...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오히려 일반적인 감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소수의 정예'가 '엄청난 수의 적'과 맞서는 설정이 주는 감상...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보는 듯한 이미지의 재현이 하나 있을 것이고... 정치적인 뒷거래의 결과든, 누군가의 배신이든... 어쨌든 '장렬히 죽어가는 전사의 이미지'에 대한 감상이 또 하나의 목적이 되겠죠. 그 외에도... 처절하고 잔혹한 상황과 장면의 묘사가 주는... "하드 고어"의 자극도 원작자가 프랭크 밀러 씨라면 빼 놓을 수 없는 요소일 것입니다. 아무래도 '국가간의 힘의 우열과 국제 정치'의 문제는... 핵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300'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된다면.... 어떤 국가의 얘기가 문제가 아니라... 작품 깊숙히 박힌 "지극히 마초적인 이미지", "전쟁에 대한 동경", "영웅담의 환상" 등 전쟁물과 영웅물 본연의 문제에 대한 남성 중심적이고 편협한 관점이... 오히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최초의 문제 제기처럼 역사 왜곡이나, 사실 관계의 문제는 결과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는 거죠. 이미 과도하게 판타지로 변질되어 있고, 사실의 재현에는 그다지 신경을 안 쓰는 편이니까요...
만화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
프랭크 밀러 씨의 전작들을 보면서, '굉장히 사실적이다' 라거나... '보수적이다' 라고 느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자극적인 이미지, 극한의 과장, 선형이 낭자하는 파괴의 미학(?) 까지... 익숙하지 않다면 보는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을 정도의 그림이 그의 만화에 가득합니다. '300'도 예외는 아닙니다. ( 오히려 영화는 그런 과격한 부분을 많이 부드럽게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 그런 그에게 무슨 정치적 올바름을 기대해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랭크 밀러 씨의 작품 세계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정치적으로 올바른가의 문제를 생각하자면... 그닥 큰 기대를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이미 상당히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니까요... 정치적으로 올바른 만화여야 한다는 전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는 반드시 그런 전제를 이해하고 만화를 접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역사적 왜곡이나 사실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슈퍼 히어로물이 가득한 문화 속에서 그려진 만화로부터 지극히 사실적인 묘사를 기대하는 것도 비약이 너무 심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300'의 이미지를 접하면서 독자들이 올바르지 않은 정치적 관점으로 인도될 가능성은 주로 유사한 마초적인 남성 판타지에 빠지는 쪽과 연계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스파르타'의 군인이나 '레오니다스 왕'이 결코 '선한' 이미지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공감을 유도하는 것이 이 만화의 본질인 것은 분명합니다. '물러서지 않고 남자답게 장렬히 싸우다 죽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마초적 관점 아래에서... '전투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곱추를 절벽 아래로 차 버리는' 것이 은근슬쩍 정당화된다면... 인종의 우열을 운운하면서 학살을 일삼던 제3제국의 지도자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사람이 전쟁과 생명 유지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면' 만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제대로 씹어서 소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미 이 만화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거나 파악할 수 있고... 만화를 읽은 뒤 정치적으로 바르게 판단을 할 준비가 된 독자라면... 아무 문제 없이 재미 있게 만화를 읽고 즐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소재든, 만화든, 작자든, 역사든... 그 어디든 같은 길로만 갈 수는 없는만큼... 준비된 독자라면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단, 사고의 훈련이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이 만화를 접한다면... 우려할만한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추측하건데... 준비 되지 않은 독자가 무슨 오류에 빠지건 말건... 원작자는 신경도 쓰지 않을테지만... 말이죠...
이미지를 위해 한 번을 읽고... 메시지에 공감하면서 한 번을 읽었다면... 가슴이 아닌 머리로 한 번 다시 읽어보는 것도... '300'과 원작자인 프랭크 밀러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300'은 좋은 만화입니다. 강추하고 싶은 만화이지만... 다분히 마초적인 원작자의 경향은 꼭 참고하고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 이해가 뒷받침 되면 더 재밌게 보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면이나, 그림과 이미지가 거칠다는 면에서... 강렬한 이미지가 따 놓은 점수를 많이 까먹기는 하지만... 사고하고 사유하기를 좋아하는 일반인들에게는 10 점 만점에 8 점은 줄만하다고 봅니다. 가볍게 즐기길 원할 때는 10 점 만점에 4~5 점 정도를 줄만한 만화인 것 같네요... 특히, 그림이나 만화 공부를 하시는 분들에겐 도움이 되는 면이 있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