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만큼... 영향력이 강하고 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판타지 소설의 한축... "땅바다 이야기 연작( 어스시의 마법사 연작 )"의 작가인 어슐러 K. 르 귄... 세계 3대 판타지 소설... 어쩌구저쩌구... ... 뭐 이렇게 거창하게 소개를 할 수 있겠습니다만... 케로군의 체질은 아니군요 ^^
여튼 장편 소설인 다른 판타지 소설과는 분명하게 차별화되어 있다는 느낌으로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를 읽을 때 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르 귄의 단편 소설 모음집이 바로 이 "바람의 열두 방향"입니다.
르 귄의 판타지
르 귄의 소설은... 땅바다 이야기를 읽던 때부터, 차분한 인간 심리 묘사... ( 이야기 속에 녹아나는 입체적인 캐릭터들... ) 지루하지 않은 사건의 전개... (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 등을 읽다가 종종 졸았던 기억이... -O-; ) 풍부한 상상력... ( 판타지...라는 이미지에 얽매여 길을 잃지 않습니다. '-' ) 등의 분명한 차별화 전략(?)으로... 이미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땅바다 이야기에서도 전형적인 판타지의 세계를 인용하되, 같은 소재로 다른 세계관을 재창조해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흔한 판타지 세계관에서처럼 마법과 마법사, 용과 이세계 여행이 소재로 쓰이지만... 인간미 풀풀 넘치고 절대적이지도 않은 마법사, 거대하고 강력한 존재지만, 감정도 생각도 없는 게임의 보스 몬스터 같은 이미지와는 분명히 다른... 용이라는 '인간과 다른 존재'... 단지, 환상의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가 아닌 이세계 등등...
결정적으로 르 귄의 판타지는...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영웅의 성공담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종 그런 기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한다는 느낌까지 받습니다. 물론, 철저한 비극이나 디스토피아를 연출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난과 시련을 겪은 끝에 대단한 것인지 대수롭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얻은 뒤 지난 시간 거쳐온 과정과 얻어 낸 결과를 성찰하며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 그러면서, 성찰의 과정이 심심하지 않도록 풍부한 상상력을 소스로 첨가하는... 그런 느낌이 르 귄의 판타지의 색깔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르 귄의 판타지에는 순수 문학(?)이 주는 것과 같은 부류의 여운이 남습니다. ( 케로군이 판타지 문학을 순수 문학으로부터 분리해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
재미있습니다.
물론, 문학적 깊이... 이런 게 케로군에게 절대적인 가치는 아닙니다. 문제는 "재미있느냐?" 하는 것이죠...
르 귄의 소설은 재미있습니다. 특히, 땅바다 이야기 연작보다도... 이 단편집은 더욱 재미있습니다. 호흡이 짧기 때문에 읽기도 쉽습니다.
[ 물론 그 재미를 잘못 이해하면 이렇게 죽도밥도 아닌 모습이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O-; ]
열 일곱 편의 단편 소설( 열 두 개가 아닙니다. -O- ) 중에는 몇 개의 굉장히 머리 아픈 내용을 빼면... 한 번 호흡에 다 읽어내려갈 수 있는... 짧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여럿 배치되어 있습니다.
열 일곱 가지 이야기는 고전 판타지, 근현대 판타지, 땅바다 이야기 세계관의 소설, SF 등의 장르를 거침 없이 넘나들며, '사람이 이렇게까지 상상력을 펼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말 그대로 열 두 방향으로 불어대는 바람처럼... 자유 자재로 변신하며 다양한 향기를 전달합니다. 그러고보니... 판타지, SF 하면서 장르를 구분해서 얘기하는 것도 참 바보같은 짓이군요... 르 귄의 소설은 장르 구분이나 순수/비순수 문학의 구분같은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구차한 설명 없이...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결과물로 확인시켜주고 있으니까... 말이죠...
대작 판타지를 만나기 전에
몇몇 좋은 소설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서점가의 한 켠을 장식하고 있는 이른바 "한국형 판타지"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색안경을 쓰게 됩니다. 무조건 해외 판타지가 좋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인정할만한 대작과 걸작, 수작들이 해외 작가들의 판타지 소설 중에 많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작과 걸작이라고 꼭 좋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나니아 연대기"같은 경우에는 과하게 기독교적인 색채가 묻어나 부담스럽습니다. 재작년인가 나온 합본의 경우에는 책이 두꺼운 것도 부담스럽습니다. "반지의 제왕"은 호흡이 과하게 길고, 웅장한 상황 묘사에 비해 박진감이 떨어집니다. 전쟁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치고는 긴장감을 유지하는 힘이 부족해보입니다. 추천할만한 다른 작품으로 "앰버 연대기"가 있습니다만, 이른바 "양키 필"이 우리 정서에 잘 맞지 않고 아주 조금 부담됩니다. "땅바다 이야기"는 참 균형이 잘 잡히긴 했습니다만... 호흡이 조금 긴 편이긴 합니다.( 반지의 제왕보단 낫지만... 말이죠 )
그런 의미에서... "바람의 열두 방향"은 판타지 대작이나 걸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람에게... 처음으로 권하기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오금 긴 장편으로 시작하려면 "땅바다 이야기"나 "앰버 연대기"도 좋겠습니다만... "바람의 열두 방향" 만큼 '처음 읽기에 좋은' 아이템도 없는 것 같습니다. ^^;
감히 "바람의 열두 방향"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면... 추천 도서 별점 열 개 만점이라면 여덟 개 정도는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밌다에 8점, 내용이 알차다에 9점, 읽기 편하다에 7점 정도?
결론적으로... 판타지 소설의 걸작이나 대작을 제대로 읽어보시려는 분들에게.... 판타지와 SF의 경계를 허문 탈 장르적 소설을 찾으시는 분들에게... 풍부한 상상력과 문학적 깊이가 공존하는 문학 작품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바람의 열두 방향"을 강력하게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