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의 책 KOREAN ILLUSTRATION 표지 : 이미지 출처는 일본 아마존입니다.]
어제 오후 루리웹에 올라온 글로부터 시작해서 댓글에서 이래저래 논쟁이 있더군요... 루리웹 댓글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지만... 댓글을 읽던 중 이런저런 이유로 눈에 거슬리는 내용들이 있어서, 몇 마디 적어 보았습니다.
댓글 내용은 정리하면 크게 두 가지...
한 가지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 저런 책이 나온 이유에 대해 씁쓸, 궁금해 하거나, 이유를 추측하면서... 외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소개니까 일본에 나오는 게 당연한 일이다 아니다 하는 이야기나, 우리나라 불법 복제 문제다... 라거나 일본도 불법 복제 한다 안한다거나... 뭐 그런 류의 이야기가 있었고,
다른 한 가지는 김형태 씨의 그림이 표지로 걸리고( 맨 앞에 명함을 내밀고 있는 것도 김형태 씨가 맞지요 ^^ ) 한 것이 문제다라는 지적과 ( '망신이다' 라는 표현도 있었죠. ) 그에 대한 반론과 이어지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였습니다.
제가 관심 있는 내용은 물론 후자의 내용이고, 댓글 논쟁을 보면서 생각했던 것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주의) 케로군의 사견이 다수 들어 있으며 텍스트의 압박이 예상됩니다. '-' 관심 있는 분들만 클릭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김형태 씨가 한국 일러스트레이션의 대표작( 뭐 편집자 마음대로 뽑은 것이겠지만 )을 소개하는 책에서 표지 그림을 징식한 것이 문제라는 주장은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 논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 김형태 씨의 그림은 인체 비례에 문제가 많다. - 김형태 씨가 그리는 여성의 신체는 과장이 심하다. - 김형태 씨의 데생력이 의심스럽다.
거기에 반론을 훨씬 많은 분들이( 댓글 다시는 분의 수로 봐서는 수적인 차이가 크군요. ^^ ) 주장하는 논지도 몇 마디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김형태 씨의 그림은 데생력이 극강에 이르러 나름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 극사실주의 작가가 아닌 이상 캐릭터의 비례나 데생력을 운운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 게임 캐릭터 디자인이나 캐릭터 일러스트는 인체 비율이나 비례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 다른 일러스트나 만화 등에도 딴지를 안 걸면서 왜 김형태 씨 그림만 시비냐?
뭐, 이 정도인 것 같습니다.
다른 글에서도 종종 말씀드렸듯이 케로군의 생각으로는 "감성적인 결과를 평할 때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김형태 씨의 그림에 대해 저에게 물어본다면... 취향으로 봤을 때 수 백 광년 떨어져 있기 때문에 흥미 없다고 말하겠지만, 그것이 김형태 씨의 그림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꿔 말해서... 수많은 사람이 어떤 그림이나 작가를 좋아한다 그래서, 어떤 객관적인 평가로 높이 평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동XX기"라는 가수가 있고 그들이 한국에서 가장 많은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해서, "동XX기"가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가창력을 가졌거나, 최고로 '노래 실력' 혹은 '춤 실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특정 관점에서 최고라거나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해서, 그 인기나 "다수의 사람들이 가진 감정적인 선호"가 어디 도망가지도 않습니다. "동XX기"를 진정 아끼는 팬이라면 어느 면이든 "동XX기"가 최고야...라고 억지를 부리기보다는... 모든 조건과 상황이 만들어낸 현재의 "동XX기"라는 사람들이 좋고 그들의 노래나 춤이 좋다... 라고 믿고 즐거워하겠죠.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강요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부딪히는 문제는 종종 "감정적인 선호"가 ( 특히 다수의 지지자가 있을 때 ) "객관적인 평가"로 둔갑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상을 그냥 그럴 수도 있지...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가기에는... 문화적인 집단주의에 의해 다양한 시도와 작품들이 사람들의 관심 범위 밖으로 밀려나 버리는 우리네 현실이 발목을 잡습니다.
위의 댓글을 쓰시는 분들도 요점 정리를 해 보면 어느 정도 생각이 비슷한 부분도 있습니다. 김형태 씨의 그림이 '비정상적인 면'이 있다는 거죠. 그게 그 사람의 스타일이니 문제다 아니다 하는 건 참 난해한 문제입니다. 물론, 거기에서 이어지는 주장 중에 "프로는, 어느 경지에 다다른 사람은, 게임 캐릭터 일러스트에서는 인체 비례니 데생력이니 하는 것은 필요 없다"는 주장만큼은 분명히 잘못된 얘기입니다. 심지어 눈에 거슬릴 정도로 과장된 캐릭터를 그리는 김형태 씨 역시... ( 직접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 분명히 데생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어떤 아마추어, 프로, 대가든 누구든 그렇게 하겠지만... 마찬가지로 ) 틈틈이 그림을 그리며 실력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겁니다. 과장되거나 비틀어진 캐릭터를 그리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고도 보는 사람이 좋아라 하기를 원한다면 ) 더더욱 기본적인 비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기준이 있어야 비틀든지 하겠죠.... 수많은 일본 만화, 애니의 '눈큰이'들이나 과장되게 묘사되는 캐릭터들 역시... 기본에 충실한 연구 없이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만한 왜곡을 만들지는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과장된 그림 스타일이 마냥 좋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말 그대로 '기호'의 문제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림체가 완성되는 동안 팬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그 그림이 좋은 것을 넘어서서 '우수하다'의 경지에 이르렀을지 모르지만... 반대로 호불호가 분명한 이런 그림체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진 경우에는 더더욱 눈에 거슬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왜곡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반복적으로 감상하는 사람들은 영향을 받게 되어 있으며, 실력이나 기본이 부족한 사람들이 그 뒤를 좇기 시작하면 전반적으로 기반이 튼튼하지 못한 아류가 양산되면서 전반적인 작품 수준이 떨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 실제로 김형태 씨의 그림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그림들을 많이 보지 않았던가요? )
또, 이런 '왜곡된' 그림이 특정 작품의 일러스트로 쓰였다거나, 특정 게임의 표지에 등장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만,( 그야말로 개성이나 스타일의 문제일 뿐이죠. ) 이름부터 거창하게( 이 부분은 일본 애들의 상술이 조금 영향을 미쳤겠습니다만 ) '한국의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붙이고 떡하니 김형태 씨의 그림을 얼굴 마담으로 내밀었을 때는 의미가 많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좋아해 마지 않는 우스다 쿄스케님의 "재규어" 같은 캐릭터가 아무리 좋다고 해서... '일본 일러스트레이션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가정입니다. ) 재규어의 그림을 "일본의 일러스트레이션"의 표지로 썼을 경우에 독자들이 갖게 될 오해....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씁쓸해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일본 일러스트레이터나 디자이너들의 어려운 상황'( 역시 가정입니다. )을 고려하면... 기회를 줄 수 있는 상황이 오히려 기회를 줄일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전혀 상황에 걸맞지 않는 일본 일러스트레이션을 국내에 소개하는 예와 달리, 한국 일러스트를 일본에 소개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위의 얘기가 단순히 가정만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은( 김형태 씨처럼 인정받는 분을 포함해서 ) 실력에 비해 평가는 커녕 잘 알려지지도 못하고 있으며, 더더군다나 일본인이 보기에 한국 일러스트레이션은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아예 접할 기회가 없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김형태 씨의 독특한 스타일( 좋고 나쁨을 떠나서 )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식된다면...( 이 책 하나 가지고 그럴리는 없겠지만... 말이죠 ^^ ) 선입견이 생기지 않을까하는 우려는 정당하다고 봅니다. 물론 팬의 입장에서야 반갑지 그지 없겠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그만큼 우려가 클 수 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양측의 주장이 나름의 입장에서 옳을 수 있지만, 저로서는 다른 좋은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이 표지를 장식하는 게 더 좋지 않았겠는가라고 생각할 수 도 있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이런 독특하고 인기 있는 작가도 있다 하면서 김형태 씨를 소개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바램이죠.
물론 "마그나카르타 진홍의 성흔" 덕분에 일본에 지명도를 어느 정도 가진 김형태 씨의 그림이 표지를 장식한 현실이 당연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뭐, 예술을 국가의 레벨로 나누어 생각하는 데는 별 의미가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시장과 문화가 구별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이런저런 아쉬움이 참 많이 남는 한일관계입니다.
결론을 맺자면...
- 기호 문제를 가지고 좋다 나쁘다고 따지는 논쟁이나, 감성적인 작품에 대해 순위를 매기고 우열을 가리기 위한 논쟁은 무의미하다.
- 적어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현재의 위치를 차치하고 데생과 인체 등의 비례에 대해서는 언제나 노력하고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한다.( 김형태 씨도 물론 그러고 있을 것이리라는 추측을 포함하여 )
- 인기와 실력이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 감정적인 선호도가 높은 것을 '보편적인 가치'로 끓어올릴 수는 없으며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 지나버린 일에 대한 아쉬움이라면, 보다 '보편적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그림이 '한국 일러스트레이션'을 '대표'하는 표지를 장식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뿌리가 깊지 못한 우리네 그림판에서 이러쿵저러쿵 왈가왈부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런 논쟁이라도 지속되면서 여러 사람의 생각이 깊어지고, 오랜 수련의 결과로 쌓인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그림이 모두 인정 받으면서, 전체적으로 시장이 성숙하고 판이 커지면서 전반적인 그림의 수준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장광설을 늘어 놓아 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