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는 종종 들었지만, 그다지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영화. 원작자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직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지 않은 원작자. '파트리크 쥐스킨트' 원작 소설 "향수"를 영화화한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는... 잘못했으면 평생 못 보고 지나칠 뻔한 그런 영화였습니다.
어쨌드, 우연히 이 영화의 인상적인 ( 그리고 다소 징그러운 ) 초반 몇 장면을 보게 되었고, 신선한 충격을 받고, DVD를 구입하고.... 영화를 끝까지 감상하고 난 뒤의 느낌은.... "대단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네요.
원작의 힘도 대단하겠지만, 영화적 상상력이 가득한 뛰어난 연출.... 관객을 감정 이입 시키는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 역할의 '벤 위쇼'의 뛰어난 연기... 그리고, 영화의 톤을 끝까지 일정하게 이끌어주는 나래이션까지.... 어느 하나 빼놓을 것이 없는 걸작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 극장에서 보지 못 한 것이 한입니다. ㅠ.ㅠ )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한'이라는 문구가 딱 들어맞는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일 것 같네요. ( 누구에게나 먹힐 법한 재미있는 영화인데도 아쉽게도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말이죠... )
( 아래 글을 펼치시면 다수의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재미있는 영화
속 깊은 영화,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영화들에 대한 흔하게 알려진 잘못된 편견 중 하나는.... '작품성이 높으면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라는 말이 상당히 주관적인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2007년 현재의 주류 영화계를 보면 위의 명제가 꼭 틀렸다고만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재미'의 형성을 위해서는 관객의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평범한 관객이 듣도보도 못했을 법한 영화적 언어는 적어도 '재미'의 요소는 될 수 없습니다. 덕분에, 깊은 성찰과 오랜 고민, 피나는 노력으로 만들어낸 영화가...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아무런 어필을 하지 못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덕분에... 나름대로 기준을 가진 평범한 관객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화적 언어들로 가득찬 영화에 대해 '예술 영화'라는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일리가 있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생각하고, 고민하고, 노력해서, 느끼도록 만드는 영화가... '재미 없는 예술 영화'여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같은 인간의 경험과 느낌을 이야기하는데 존재하는 언어적 괴리는 그닥 높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향수"는 분명 "작품성이 높고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다소 징그럽게 보일 수 있는 지극히 서민적인 초반부를 지나면 ( '서민적'인 것이 '징그럽게' 보이도록 만든 건 도대체 누구일까요? )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유머와 위트,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 극적인 상황 등이 연출됩니다. 속 깊은 영화적 언어를 모르더라도, 아름다운 화면과 색상에 감동할 줄 모르더라도, 큰 줄기의 내러티브를 타고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재미들이 한 보따리로 제공됩니다. 그런 자연스러운 '재미'에 따로 설명을 하는 게 구차해보일 정도군요.
물론, "향수"의 재미가 그냥 평범한 유머의 반복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공 '그루누이'와 이어진 인물들의 어이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극적(?) 전개, 단순히 냄새만 잘 맡는 게 아닌 타고난 향수 제조자로서의 '그루누이'의 천재성에 대한 묘사, 인간 이성에 대한 가차 없는 비난과 함께한 통렬한 풍자.... 드라마로서, 판타지로서, 스릴러로서, 코미디로서의 장점이 잘 버무려진 짬뽕이 되어서 마치 정체불명 가십 투성이의 기사가 가득한 주간지를 읽는 듯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생각을 해도 재밌고, 생각을 지워버려도 재밌는 그런 재미... 말초적이면서도, 고민거리를 던지는 그런 재미가 있기 때문에... 어떤 관점에서 보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 = 벤 위쇼
IMDB에 의하면, 이 영화의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의 역할은 원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올란도 블룸' 중에서 한 명으로 내정되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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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위쇼'라는 나름 무명의 배우는.... 무슨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 준 것은 아니지만... "향수"에서의 그는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 그 자체를 보여줬습니다. 연기가 필요 없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영화를 보면서, 처음 느꼈던 약간의 거부감, 혐오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어느 순간 주인공에게의 감정 이입으로 뒤바뀌고.... 말미에 가서는 부디 궁극의 향수가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만 간절해집니다.
다른 영화였으면, 감독의 총애를 받았을 가장 핵심적인 여성 캐릭터, '레이첼 허드-우드'가 분한 '로라'는...
'그루누이'에게 감정 이입 된 제 눈에는 단순한 "향수 재료"로 보일 뿐입니다... ;;; 그루누이의 일대기를 따라왔던 다른 관객도 다들 이런 느낌이었을까요? 이미 이성과 판단을 떠나서, '향수'의 관점으로 세계를 본다면... '살인자의 이야기' 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향수 제조사의 이야기'만 머릿 속에 남지 않을까요?
영화를 보고 난 뒤 다시 생각해 보면, '레오'나 '올란도'가 연기하는 그루누이는.... 너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냥 어울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마치 '그루누이'가 생선 쓰레기 속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황실의 비단 침대에서 태어났다는 느낌이랄까? 이 영화에서 '벤 위쇼'의 발견은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이슈인 것 같네요. 물론, 반대로 이 영화에서의 이미지를 앞으로 어떻게 극복할까 하는 걱정도 생기지만... 말이죠...
아름다움과 향기로움
"향수"에는 때론 긴장하면서, 때론 크게 웃으면서 영화의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세 번 정도 잠시 숨을 고르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첫 대목은 그루누이가 '자신의 향기'를 찾지 못하는 동굴의 장면... 두 번째 대목은 '궁극의 향수'가 그 힘을 발휘하는 장면... 마지막은 위의 이미지가 등장하는 마지막 '자기 희생'의 장면입니다.
영화가 위의 세 가지 대목에서 던지는 질문은, 영화 전체의 주제가 던지는 질문과도 같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이란 무엇인가? 단편적인 재미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미식가들의 입맛을 돋굴지도 모르겠군요. 케로군처럼 단순한 인간도 잠시 생각에 빠집니다. 왜 그는 가장 비린내가 진동하는 시장의 생선 쓰레기 가운데서 태어났는가... 그리고, 부유하고 호화로운 족속들은 무슨 냄새를 숨기기 위해 향수를 뿌리는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이란 얼마나 허망한가.... 심각하려고 마음 먹으면 한 없이 심각해질 수 있는 '예술 영화'의 모양새입니다. ( 물론 이런 고민이 싫다면 그 외에도 재미있을 것은 충분히 많습니다만... )
사실, 이런 질문에 학력고사 주관식 문제 답안을 쓰듯... 간단명료한 정답을 적을 수는 없을 겁니다. 영화는 답을 기대하기보다는 단지 화두를 던지는 거겠죠. 아마, 소설이 가는 길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향수"의 경우는 어떨지 궁금합니다. 같은 화두가 던저지는지, 그리고, 그 질문을 받은 독자의 느낌은 어떠한지.... 소설을 먼저 읽었을 때의 이미지는 어떠했는지... '감상의 순서가 반대인 분'의 느낌을 들을 수 있다면 더 재밌겠네요. ^^;
이제, 순서는 문제의 소설 "향수"를 읽는 겁니다. 그러고보니 케로군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군요. ( 살짝 민망... '-'a ) 다행히, 프리미엄 에디션 DVD에는 소설책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
영화를 보고 나면 마치 간만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소설을 읽은 기분입니다. 확실히 재미도 있고, 충분한 작품성도 있는 소설같은 영화.... 누구에게든 추천을 하고 싶긴 합니다만... 비위가 심하게 약하신 분은 영화 초반의 장면에 거부감을 느끼실 수 있다는 점... 다소, 과격하고 오버하는 연출이 있다는 점...( 은근히 이런 걸 싫어하는 분들도 있죠... ) 에서 신중한 선택은 필요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점수를 매기면 만점을 주고 싶었지만.... 다소 신중한 선택을 요하는 요소들 덕분에.... 10점 만점에 9점 + α 의 점수를 매겼습니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감히 제가 점수를 깎지 못할 정도로 정말 잘 만들어 졌습니다. 일단 케로군과 비슷한 인종들에게는 무조건 추천 ! ! ! 대부분의 영화 팬에게도 강력 추천합니다. 영화 학도나 관심이 깊으신 분들은 물론 ( 이미 보셨겠지만 ) 필수 관람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꼭 보시기 바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