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칼럼(?)을 쓰네요. 이번 글의 재료는 요즘 영화도 개봉하고 해서 말이 많은 허영만 선생님의 '식객' 입니다.
실은 꽤 오래 전에 이 글을 쓸 생각이었습니다만, 최근 영화 개봉이라는 이슈가 있고보니... 왠지 시류에 영합하는 것 같고 해서.... 괜히 홍보에 도움 주고 싶지도 않고 해서... 조금 참고 있었습니다. 뭐, 이제는 영화도 뜰만큼 떴으니... 부담 없이 글을 써도 되지 않나 싶긴 하네요... ^^;
영화와 원작을 비교한다는 것은 대부분 좋지 않은 결론으로 나게 마련입니다. 소설이나 만화 원작이 크게 흥행할 정도로 좋았다면, 영화화했을 때 그것을 따라잡기 어려울테니까요. 간혹 예외가 있긴 하지만.... 적어도 예고편만 봐서는 '식객'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대중성을 강조한 영화화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왠지 저로서는 내키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만화만 읽고 상상 속의 이미지만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 영화 예고편 때문에 이미 망가지긴 했습니다. -_-; )
그런데 정작.. 대작이라고도 하고 재밌다고도 하는 허영만 선생님의 '식객'.... 물론, 훌륭하고 역사적인 작품임에는 틀림 없습니다만.... 그렇게 좋기만 한 작품인가.... 라는 질문에는.... "글쎄요"라는 답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죠. ( 아래 칼럼 중에는 스포일러 또는 네타에 해당하는 내용이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
추천
케로군이 읽는 만화 작품 중 상당수는... 주변에서 만화를 많이 보거나 직접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의 추천을 통해 처음 접하곤 했습니다. '식객' 경우에는 석가가 추천을 해 주었는데요, 실은 추천을 하지 않았더라도 한양문고에서 열 권 가까이를 한꺼번에 사들고 나오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궁금해서라도 구입해 보았을 겁니다.
책을 읽은 뒤에는, 케로군도 주변 사람에게 여러 번 이 책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 물론 몇 마디의 코멘트를 꼭 붙였습니다만... ) 은근히 특정한 상황, 특정한 조건에서 추천하기 좋은(?) 만화 작품으로 자리매김한 느낌입니다.
'식객'을 추천하는 주된 이유는.... 탄탄한 그림이나 감동적인 이야기... 라는 흔한 미사여구보다는... 철저한 취재와 조사를 거친 '정보'와 우리나라 사람의 정서에 어필하는 '손맛'에 대한 이야기.... 이 두 가지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선 '식객'은 방대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요리 방법, 재료에 대한 정보 뿐 아니라, 음식점이나 일부 사회상에 대한 것까지.... 가끔은 너무 상세하고 긴 설명이 지겹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많은 정보가 나열됩니다. 특히, 실존하는 ( 간혹 사라지기도 하는 ) 음식점에 대한 정보를 따라가는 사람이 생기다보니 '식객 맛집'이라는 게 생길 정도라고도 하더군요...
더욱 중요한 두 번째는 '손맛'에 대한 것입니다. '식객' 이야기의 많은 부분에서 직간접적으로 '손맛'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무언가 정확하고 철저한 것보다는.... 약간 대충한다는 느낌, 약간은 임기응변의 느낌... 그런 것이 우리 정서에 어울린다고 작가는 끊임 없이 얘기하고 있습니다.
대결
'식객'의 영화화 즈음해서 '미스터초밥왕'의 테라사와다이스케 님이 방한해서, 안 그래도 비교대상이 되던 두 만화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갔습니다. '초밥왕' 외에도 여러 가지 요리 만화를 그린 테라사와 님이지만, 어쨌든 국내외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인정 받는 작품인 '초밥왕'과 비교할 수 밖에 없겠죠....
두 작품을 비교하면... '요리'라는 소재, 종종 등장하는 대결 구도, 범접하기 힘든 장인 정신의 묘사, 젊은(?) 주인공 등등....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초밥왕'만 알고 있는 독자에게 '식객'을 추천하는 사람을 여러 번 보기도 했었죠....
하지만, 케로군이 보기에는 두 작품은 간단히 비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다른 종류의 작품인 것 같습니다. '인간'을 소재로 한 영화라고 해도 히틀러의 광기를 다룬 것과 로맨틱 코메디가 전혀 다른 것처럼... '식객'의 특징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포인트는 '주인공의 위치'와 '대결 구도'입니다.
'식객'의 주인공 성찬은 마치 '낭인'이나 '유랑 무사'처럼 어떤 절박한 이야기 구조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자유인'처럼 자신만의 생활을 영위하고... 속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물론 특정 에피소드에서는 그 때 그 때의 이유가 있어 눈을 빛내면서 진지하게 속세의 문제에 끼어들지만... 이야기가 마무리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위치로 복귀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성찬의 이미지는 호텔 주방이나 고급 요정의 내실에 틀어박힌 절대 고수가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가정집의 푸근한 '주부의 이미지' 그대로입니다.
'대결 구도'도 일반적인 요리 만화의 대결 구도와는 크게 다릅니다. '식객'의 핵심은 '대결'이 아닙니다. 허영만 선생님은 누누히 먹는 것을 두고 순서를 따지는 것의 덧없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도대체 '대결'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물론, 어떤 이유에 의해서 대결을 해야 할 상황이 반복해서 등장하지만... '가장 좋은 음식'을 만드는 것이 '남을 이기는 것'과는 다르다는 뉘앙스가 결코 빠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재미 있느냐, 재미 없느냐'라는 논의와는 별개의 의미로 뜻깊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지 않는 이유
케로군이 영화 '식객'을 보지 않으려는 이유는 앞서 모두 얘기했습니다. '식객'의 주인공 성찬은 푸근하고 넉넉하고 ( 성별을 떠나서 ) '아줌마스런' 이미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아줌마스런 이미지'가 있어야 '손맛'이라는 걸 기대할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영화 '식객'의 주인공 김강우 씨는... 일단 이미지에서 어울리지 않습니다. ( 차라리 임원희 씨가 인상을 펴고 '성찬'을 맡았다면? -_-? ) '식객'을 통해 보고 싶은 건 꽃미남 천재 요리사의 극적인 무용담... 이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영화에서 만화와 같은 기대치를 그대로 담을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영화적인 '대결 구도'가 없다면... 그리고 꽃미남 천재 주인공이 없다면.... 또, 주인공 옆에 미녀가 붙어주지 않는다면... 음모와 계략, 반전이 없다면.... 영화 만들기는 조금더 어려워지겠죠.... 그걸 알면서도 영화 예고편을 보면서 살짝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아마도 '손맛의 이야기'가 '요리 활극'으로 변질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케로군의 성격 탓이 아닌가 싶네요.
같은 허영만 선생님의 만화 원작이라도.... '타짜'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는 생각입니다. 만화 원작 자체가 극적이고 격렬하고 '도박의 대결 구도'를 내포하고 있었던 데다가... 영화화 과정에서는 '이미지'에 많은 투자를 해서 원작과의 이야기에 대한 비교를 원천 봉쇄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식객'은 멋있는 요리를 한가득 화면에 뿌려준다고 해서... 무마될 그런 성격이 아닌 것입니다... 타짜의 경우가 영화와 만화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구조였다면.... 식객의 경우는 각각 영화와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이 갈릴 수 있는... 그런 구조가 아닌가 하네요. 케로군이 '식객의 영상'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화려한 색상의 "요리"가 아니라...
극중에 등장한 위 사진의 '콩국수'처럼.... 소박하면서도 깊은 맛이 나는.... 그런 "음식"의 영상이었습니다. '전어 굽는 냄새에 집나간 며느리가 돌아오는' 이미지 라든가... 잊었던 '청국장'의 맛과 잃었던 여자 친구를 함께 다시 만나는 이미지라든가...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몰래 전해 주던 찐 '고구마'의 맛을 보는 이미지, 왠지 그런 영상으로 영화화되지 못했다는 게 아쉽네요.
순수하게 작품의 깊이나 만든이의 노력... 그리고, 종합적인 완성도를 놓고 보면... '식객'만큼 'well-made 만화'라고 부를만한 작품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냉정하게 말하면 튼튼한 구성과 알찬 내용이 재미를 반감시키는 것도 사실입니다. 위에 언급한 모든 장점이나 매력들이 오히려 해가 된다는 거죠.... 그래서, '재미'를 위해 책을 읽으려면... '식객'만의 장점은 거세하고 읽을 수 밖에 없습니다. ( 영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렇다고... 텍스트를 놓치지 않고 모두 꼼꼼히 읽고 지나가기에는.... 서술을 넘어 백과사전 수준에 도달한 방대한 정보가 눈꺼풀을 잡아당깁니다.... 매 권마다 두꺼워지는 책의 두께도 문제여서 20권이 되면 사전 수준이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합니다. 방대한 분량도 좋다지만, 왠지 축약하고 압축하는 맛이 없달까? 너무 많은 조미료가 들어가버린 그런 느낌입니다.
그래서, 케로군은 감히... 이런 대작에게 ( 굳이 매긴다면 ) 평점을 10점 만점에 7점 정도를 주었습니다. 만화가 가지는 뛰어난 가치와 독자가 느낄 수 있는 흥미를 저울질 해본다면 이 정도가 아닐까요? 이 책을 처음 추천해 준 석가의 만화를 볼 때와도 비슷한 문제점 지적이 되겠는데요... 작품성과 이야기에 실린 무게의 반 만큼이라도 재미를 담아낼 수 있으면...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