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기 전까지, 케로군은 '미야베미유키(宮部みゆき)'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무라카미류'를 제외하면, 제대로 읽은 일본 소설도 얼마 없기도 했고, 더군다나 '드라마'에 속하는 글은 그닥 좋아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살인의 해석'을 읽고 난 뒤에 써니 양의 강력 추천을 받아 '모방범(模倣犯)'을 접하게 되었습니다만, 생각보다 무거운 텍스트, 방대한 분량 덕분에 세 권의 책을 다 읽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여성 소설가에 7년 동안 1등을 했다'든가 하는 낯간지러운 광고 문구가 살짝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오버하는 듯한 '일본 출판계의 전설적 베스트셀러' 운운 하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그만큼 충격적으로 다가갈만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겠죠.
[ 약간(?)의 스포일러 또는 네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서를 구입하실 분은 주의해 주세요. ]
추리 소설이 아닌 추리 소설
이 소설의 장르를 쓰레기정보의 바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이런 저런 미사여구와 수식어가 붙은 괴상한(?) 장르의 이름들을 여럿 만나게 됩니다. 그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라면... 보통 'XX추리 소설'로 구분하고 있다는 정도? 그렇지 않은 분류도 있다지면, 보통은 '모방범'을 '추리 소설'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케로군의 눈에는... '모방범'에서 추리의 요소는 그닥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3부 구성으로 이루어진 소설 중에서, 2부의 초입에 이미 두 명의 범인이 누군지 알려주고, 3부의 초입에는 구체적인 실명까지 모든 독자들이 알게 됩니다. 범행의 수법이나 과정도, 극중의 수사관들보다 독자들이 훨씬 먼저 알게 되고, 많은 부분이 추리 소설이라면 반드시 피해갔어야 하는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 구분은,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물론, 추리의 요소를 넓게 본다면 의미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기존의 추리 소설의 장르적 요소와 구성은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나 가벼운 스릴러물이나, 드라마 정도로 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 물론 '정극'이 되기도 어려워보이긴 매한가지입니다만... ) 그 덕분에, 고전적인 의미의 추리 소설을 기대한 사람이나, 하드보일드 또는 스릴러적인 요소를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재미 없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인의 이유가 없다
이 소설 속에는 '스스로를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두 범인을 제외하면, '영웅적인' 인물이 전혀 등장히자 않습니다. 한 순간 독자들의 가슴을 속시원하게 해 주었던 인물도.. 몇 페이지만 넘기면 답답한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절대 악'처럼 묘사된 두 명의 주인공들 역시... 너무나 쉽게 인간적인 나약함을 드러내버립니다.( 정말 너무 쉽습니다. ) 이래서야 무언가 '초인적인' 주인공을 기대하는 이들에겐 실망입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핵심 요소인 '살인'에 대한 묘사는 다분히 전형적입니다. '범죄'인 살인을 '본능'의 결과물( 우발적이든 의도적이든 )로 치부하거나, 그냥 재미로( 피해자들이나 사회에 대한 자각 없이 ) 만드는 하나의 창조물로 여긴다거나 하는 점... 또는, '범인'을 '호감은 가지 않지만' 어쨌든 '인간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까지... 지금은 조금 흔한 설정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의 이야가기 펼쳐집니다. 물론, 최근의 유행을 따른 '흔하다'는 설정이라고 해서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 어떻게 보면 평범한 ) 이야기를 얼마나 더 감칠맛나게 할 수 있느냐...에서 작가의 역량이 빛날 수 있는 것이겠죠....
결과적으로 '모방범'의 범인 피스와 히로미에게는, '핑계'거리의 살인의 이유는 있을지 몰라도.... '명백한' 살인의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살인의 이유(?)나 근원(?)을 파헤쳐 가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촛점은 '살인' 자체에서 벗어나 '살인을 둘러 싼 사람들과 사회 현상'으로 옮겨갑니다. 이 쯤 되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곳에 거의 다 다가온 것 같습니다.
피해자의 목소리, 여성의 목소리
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는 그의 책 'Stupid White Men'에서, 세번째이자 마지막 문제 집단으로서 '남성들'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에서는 케로군도 그렇게 자유롭지 못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사회적 약자였고, 피해자였던 여성이라고 말은 할 수 있지만, 그 속 마음을 똑같이 느낄 방법은 없으니까요....
'모방범'에서는 '살인'을 둘러싼 이야기를 하면서 두 무리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냥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기억에 남도록 반복 반복해서 줄기차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피해자의 남겨진 가족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잠재적 피해자로서의 여성들'입니다. '살인'이 주인공 가해자로부터 시작해서, 사회를 힘으로 지배하는 남성들의 이야기로 끌고가, 마지막에는 액션 활극으로 끝나는 스릴러물의 길을 가지 않은 것도 아마 이런 이유에서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방범'은 독특합니다. '페미니즘'이나 '여성주의' 혹은...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진혼곡이 아니라,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만한 평범한( 흠집이 많은 ) 희생자의 가족과 여성들의 문제를 얘기하기 때문이죠.
아쉬운 점은, 소설 속에서도 지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인'이요 '제3자'인 독자들은... 거기다가 '남성' 독자라면 더욱더... '문제를 인식할 수는 있어도 체감하는 것은 불가능한' 근본적인 접근의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 아마 저자도 이와 같은 문제는 충분히 알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 그 때문인지, 소설의 결말은 과도하게 간결한 느낌입니다. '가해자'의 범죄에 더해 '피해자'와 '여성'의 간접적인 공격자였던 대중들에게 과도한 죄의식을 던지지도 않고 끝나다보니.... 마음이 가볍기는 하지만, 다소 허무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가해자'와 유사한 독자의 본능이 책의 말미에서 부담을 받기를 갈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네요.
결국 '피해자'의 목소리와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품은 진정한 의미는 끝내 깨닫지 못한 채 책을 덮었습니다. 차라리 다행인 걸까요?
모방범은 추천할만한 소설이지만, 몇 가지 단점이 존재합니다.
첫 번째 단점은... 길다는 것! 우리나라에는 세 권으로 출간되었지만, 각 권이 모두 500 페이지가 넘습니다. 일본에서는 상하권으로 나왔다가, 나중에 문고판은 무려 다섯 권으로 나왔죠. 긴 텍스트의 압박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 번째 단점은... 약간의 스토리의 늘어짐입니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이 책은 재미있는 부분과 재미 없는 부분이 확연히 구분됩니다. 텍스트에 시선이 고정되는 곳이 있는 반면, 하품이 나오고 넘어가고 싶은 문단도 적지 않습니다. 동어 반복도 많고, 했던 이야기를 다시 되짚는 것도 많습니다. ( 사실 이런 것이 문학적으로는 장점이 되고 내러티브도 튼튼해 지겠습니다만 ) 덕분에 '재미'의 요소는 살짝 부족해졌습니다.
마지막 단점은... 독자를 가린다는 점입니다. 독자의 취향도 많이 타겠고,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상황에 완전히 녹아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많은 사람이 소설의 이야기에 접근하지 못하고 그냥 대리만족만 하고 떠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다면 문제는 없겠죠... ^^;;
이 소설에 대해서는 별점을 10점 만점에 7점으로 매겨 보았습니다. 충분히 좋은 소설이지만.... 그렇다고 꼭 재미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다소 아쉬운 점수를 매기게 되었네요. 혹시 '모방범'이나 '미야베미유키' 씨의 팬들에게는 살짝 죄송스럽기도 합니다만, 어짜피 주관적인 점수매김이니... 그러려니 하고 봐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 그렇다고는 해도... 독특한 추리/살인 관련 소설로서 의미 있는 작품이니,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꼭 읽어보십사 추천을 하고 싶습니다. 기대하지 않고 읽었다가 '이 소설 재밌다'고 느끼실 분도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